이번에는 의자 네 개가 다 찼습니다. 지난 1차 멘토링 때 혼자 나왔던 팀장 옆으로, 못 봤던 세 명의 얼굴이 나란히 앉아 있었어요. 방학 중인 캠퍼스의 세미나실, 테이블 위에는 커피 네 잔과 과자 한 접시. 그리고 제 가방에는 포스트잇 뭉치와 마카가 들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말로 하는 멘토링이 아니라, 손을 움직이는 날이었거든요.
숙제 검사 대신, 포스트잇을 나눠줬습니다

지난 시간에 낸 숙제가 있었죠. 각자 자기 관심사, 그리고 “해결하고 싶은 불편”을 하나씩 가져오기. 그걸 발표시키는 대신 포스트잇에 쓰게 했습니다. 규칙은 디자인씽킹 발산 단계의 기본 그대로예요. 남의 아이디어를 판단하지 않는다, 일단 양으로 간다, 한 장에 하나씩. 머릿속에만 있던 생각은 흐릿하지만, 손으로 쓰는 순간 구체적인 형태가 생기거든요.
처음엔 다들 조심스럽게 한두 장 쓰더니, 옆 사람 포스트잇을 슬쩍 보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팀으로 하는 아이데이션의 힘이에요. 혼자서는 세 개에서 멈출 생각이, 넷이 모이면 서로를 딛고 계속 뻗어나갑니다.
벽이 채워지는 시간
쓴 포스트잇은 전부 벽으로 갔습니다. 한 장씩 붙이면서 자기 생각을 짧게 설명하는 방식으로요. 벽 앞에 네 명이 마카를 든 채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뒤에서 보는데, 솔직히 조금 뭉클했습니다. 한 달 전만 해도 이 팀은 “무엇을 할지”를 팀장 혼자 고민하고 있었으니까요.
벽에 모인 아이디어들을 몇 개만 옮겨볼게요.
- 혼잡한 지하철에서 승하차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방법
- 임산부·노약자석의 실제 사용률을 예측해서 지하철 공간을 재구성하기
- 화재가 났을 때 노인들을 위한 대피 동선
- 응급차가 불법 주차 때문에 출동이 늦어지는 문제
- 노약자가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의 데이터를 모아 문제를 찾는 프로젝트
- 치매 노인을 위한 공간 디자인, 다리가 아픈 노인을 위한 좌변기
- 건물·교량의 안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구조 지식과 AI로 해결하기
- 공사 현장의 안전 향상, 친환경 건물과 도시를 위한 모델링
- 그 사이에 우산 대여 플랫폼, 장애인을 위한 콘서트 공간 같은 엉뚱하고 귀여운 것들도
벽에서 발견한 것 — 기술이 사라졌다
붙이고 나서 다 같이 벽을 바라보는데, 재미있는 게 보였습니다. 1차 멘토링 때 이 팀의 언어는 BIM, 모델, 공모전, AI 도구였어요. 그런데 이 벽에는 기술 단어가 거의 없습니다. 대신 노인, 임산부, 아이, 장애인,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포스트잇 한 장 한 장이 전부 누군가의 불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전공을 버린 것도 아니에요. 다시 보면 이 벽의 문제들은 전부 공간의 문제입니다. 지하철도, 화장실도, 대피 동선도, 공사 현장도 결국 공간이고 — 공간을 데이터로 다루는 게 바로 이 친구들의 전공, BIM이잖아요. 기술을 버린 게 아니라, 기술이 설 자리가 이제야 생긴 거죠. 순서가 뒤집히니 같은 전공이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의견이 좁혀지지 않을 때 — 어피니티 다이어그램
문제는 그다음이었어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습니다. 지하철도 하고 싶고, 화재도 하고 싶고, 노인 화장실도 하고 싶고. 넷이 각자 다른 곳을 가리키면서 의견이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어요. 이럴 때 말로 계속 토론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거나, 아무도 안 이기고 시간만 갑니다.
그래서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을 꺼냈습니다. 흩어진 포스트잇을 비슷한 성질끼리 다시 모아 묶는 작업이에요. 대단한 기법 같지만 하는 일은 단순합니다. 말로 싸우는 대신, 벽 위에서 생각을 물리적으로 움직여보는 거죠. 그런데 이 단순한 작업이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듭니다. 마흔 장이 몇 개의 덩어리로 정리되는 순간, 우리 팀이 무엇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덩어리가 보이니 대화가 달라졌습니다. 각자 자기가 해결하고 싶은 문제를 하나씩 골라 왜 그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야기했고, 그 이야기들이 겹치는 지점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어요. 그렇게 팀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화재가 났을 때 노인들을 위한 대피 동선을 마련하고, 화재 안전을 위한 건물을 설계하는 것. 재난 앞에서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 설계 — 건축공학도 네 명에게 이보다 잘 어울리는 문제가 있을까요.
다음은 책상이 아니라 현장으로
주제가 정해졌다고 바로 설계에 들어가는 건 아닙니다. 디자인씽킹의 다음 단계는 책상을 떠나는 거예요. 다음 멘토링은 7월 31일로 잡았고, 그때까지 학생들은 인터뷰와 현장조사를 해오기로 했습니다. 어르신들은 화재 경보가 울리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금 건물들의 대피 동선은 그분들에게 어떤 장벽인지 — 답은 벽에 붙은 포스트잇이 아니라 현장에 있으니까요.
1차 때 저는 “기술은 나중에 붙일 수 있지만, 사람은 나중에 붙일 수 없다”고 썼습니다. 2차의 벽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학생들 손으로 직접 보여줬어요. 이제 이 팀은 자기들이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인터뷰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고 돌아올지, 3편에서 이어서 전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