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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월드, 문화적 충격 그 잡채

코믹월드 문화적충격 그잡채

사실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우리 정화예술대학교가 코믹월드에 부스를 냈다고 해서, 학생들 얼굴이나 보고 커피 한 잔 사주고 오자는 생각이었죠. 그렇게 일산 킨텍스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반나절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어요.

디자인을 20년 가까이 보고 가르쳐 왔는데, 이렇게 순도 높은 에너지를 한 공간에서 본 건 오랜만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해요.

부스 하나 보러 갔다가, 전시장 전체에 압도당했어요

입구를 지나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랐습니다. 코스프레를 한 분들이 삼삼오오 모여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어요. 의상 완성도가 상당하더라고요. 원단 선택부터 소품, 가발, 메이크업까지 — 저건 하루 이틀에 나오는 결과물이 아니었습니다. 몇 달을 갈아 넣은 티가 났죠.

그러다 한쪽에서 음악이 크게 터져 나왔습니다. 올려다보니 현수막에 「애니송 DJ」라고 적혀 있더군요. 제가 아는 곡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 앞에 모인 사람들은 곡이 시작되자마자 한 몸처럼 같은 안무를 추기 시작하는 겁니다. 손동작 하나까지 맞춰서요. 가사도 다 외우고 있었고, 후렴에서는 목소리가 하나로 겹쳤습니다.

그 많은 곡 중에 딱 하나, 제 귀에 걸린 게 있었어요. 「かわいいだけじゃだめですか?」이건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어요. 저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한참을 봤습니다. 처음엔 좀 얼떨떨했어요. 제 세대 감각으로는 노래방 문을 닫고서야 하던 일이니까요. 그런데 몇 초 지나니 감정이 바뀌더라고요. 누구 하나 쭈뼛거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표정도 없었고요. 충격이었고, 동시에 굉장히 신선했어요.

좋아하는 걸 좋아한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저는 그걸 부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 낯선 기분의 정체가 뭘까, 걸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제가 익숙한 디자인 현장은 클라이언트가 있고, 브리프가 있고, 예산이 있는 곳이니까요. 그런데 여기는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다들 저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돈을 준 것도, 학점을 준 것도 아닌데요.

전시장을 한 바퀴 돌면서 그 낯섦은 감탄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스마다 직접 그린 일러스트, 직접 만든 아크릴 스탠드와 인형, 직접 디자인한 배너가 걸려 있었어요. 기획하고, 그리고, 제작을 넘기고, 진열하고, 직접 판매까지 합니다. 창작자 한 사람이 이 전 과정을 다 해내고 있었죠. 이 정도 몰입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저는 그냥 순수한 애정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스무 살의 저는, 이걸 숨기고 다녔거든요

사실 여기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야겠어요. 저는 스무 살까지 만화가가 꿈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교과서 귀퉁이마다 캐릭터를 그렸고, 공책 한 권을 통째로 채운 적도 있었죠.

그런데 그때는 그걸 대놓고 말하기가 어려웠어요. 만화 그린다고 하면 돌아오는 건 대체로 걱정스러운 눈빛이었습니다. “그거 해서 뭐 먹고사냐”는 말이 인사처럼 따라붙었고요. 좋아하는 작품 이야기는 아는 사람끼리만 조용히 했습니다. 취향을 숨기는 게 기본값이던 시절이었죠. 한마디로 음지의 문화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서 있는 곳은 킨텍스 제1전시장이었어요. 코스프레를 한 사람들이 당당하게 통로를 걸어 다니고, 대학이 정식으로 부스를 내고 입시 상담을 합니다.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도 보였어요. 아무도 숨지 않았고, 아무도 눈치를 보지 않았습니다.

이게 진짜 실감이 나더라고요. 음지에 있던 문화가 완전히 양지로 나왔구나. 20여 년이 걸렸지만, 결국 나왔습니다. 제가 접었던 그 꿈이 지금은 어엿한 전공이 되고 산업이 됐다는 사실 앞에서, 솔직히 좀 뭉클했어요.

이건 취미가 아니라 이미 산업이더라고요

제 눈길을 가장 오래 붙든 건 ‘SOLD OUT’이라고 적힌 종이들이었어요. 어떤 부스는 진열대 절반이 품절 표시로 덮여 있었습니다. 개인이 기획해서 만든 굿즈가, 하루 만에 다 팔린 거예요.

이걸 보면서 생각이 확 정리됐습니다. 여기 있는 건 동호회가 아니라 완결된 생태계였어요. 창작자가 IP를 만들고, 상품으로 전개하고, 고객을 직접 만나 반응을 받고, 다음 작업에 반영합니다. 대기업이 몇 개 부서로 나눠서 하는 일을 한 사람이 압축해서 돌리고 있는 거죠.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요.

게다가 이 사람들은 이미 자기 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스 앞에 줄을 선 관람객들은 우연히 들른 게 아니었어요. 누구의 무엇을 사러 왔는지 정확히 알고 온 사람들이었죠. 팔로워를 팬으로, 팬을 구매자로 전환하는 그 어려운 걸 이미 해내고 있는 겁니다.

시장이 열릴 가능성을 본 게 아닙니다. 이미 열려서 잘 돌아가고 있는 시장을, 제가 이제야 제대로 본 거였어요.

웹툰애니메이션과와 게임그래픽과, 지금이 정말 좋은 시기예요

현장을 보고 나니 우리 학교 웹툰애니메이션과게임그래픽전공 학생들 얼굴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예전엔 이 전공을 두고 “취업이 되느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이제 그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를 설계하고, 세계관을 짜고, 그 매력을 한 장의 이미지로 압축하는 능력. 코믹월드에서 팔리고 있던 건 결국 전부 그 능력의 결과물이었어요. 그리고 이건 학생들이 학교에서 4년간 훈련하는 바로 그 역량입니다.

  • 진로가 회사 하나로 좁혀지지 않아요 — 스튜디오 취업, 외주 작업, 개인 IP 사업이 동시에 열려 있습니다.
  • 포트폴리오가 곧 매출이 됩니다 — 재학 중에도 부스를 열어 시장 반응을 직접 확인할 수 있어요.
  • 웹툰·게임·굿즈의 경계가 흐려졌어요 — 하나의 캐릭터가 여러 매체로 확장되는 게 기본값이 됐습니다.
  • 팬과 직접 만나는 경험이 쌓입니다 — 이건 어떤 수업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훈련이에요.

학교 부스에서 상담을 받던 예비 지원자들 표정도 인상적이었어요. 막연히 그림이 좋아서 온 게 아니라,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이미 아는 얼굴이었습니다. 이런 친구들이 들어온다면 학과는 잘될 수밖에 없죠.

디자이너이자 교육자로서 솔직히 남은 고민

좋은 얘기만 하고 끝내면 반칙이겠죠. 돌아오는 길에 계속 걸린 게 있었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시각디자인은 오랫동안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푸는 훈련이었어요. 브리프를 읽고, 타깃을 정의하고, 논리적으로 해답을 제시하는 방식이죠. 그런데 코믹월드에서 잘되던 창작자들은 순서가 반대였습니다. 자기가 미치게 좋아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그걸 좋아해 줄 사람을 나중에 만났어요.

저는 학생들에게 “타깃을 정의하라”고 가르쳐 왔는데, 정작 시장에서 통하는 건 “너의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라”였던 겁니다. 어느 쪽이 맞다고 단정하긴 어려워요. 다만 제 수업이 학생 안에 있는 그 뜨거운 걸 혹시 식히고 있진 않았을까, 그 질문이 계속 남습니다.

그래서 다음 학기에 해보고 싶은 게 생겼어요. 브랜딩과 상품 기획, 진열과 판매까지 학생이 직접 경험해 보는 과정을 넣어 보려고 합니다. 작게라도 부스를 한 번 열어 보는 거죠. 자기 그림이 실제로 팔리는 경험, 혹은 안 팔리는 경험. 그 하루가 한 학기 강의보다 클 것 같거든요.

자주 받는 질문

Q. 웹툰애니메이션과나 게임그래픽전공, 그림을 잘 못 그려도 갈 수 있나요?

그림 실력은 학교에서 올라갑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을 오래 파고드는 힘이에요. 코믹월드에서 잘되던 창작자들의 공통점도 실력보다 지속성이었습니다.

Q. 시각디자인전공과 웹툰·게임 전공은 뭐가 다른가요?

시각디자인은 메시지를 설계하는 훈련에 무게가 있고, 웹툰·게임 전공은 캐릭터와 세계관을 만드는 훈련에 무게가 있어요. 다만 요즘은 두 역량이 함께 필요한 일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학생들 얼굴 보러 갔다가 제가 더 많이 배우고 왔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얼마나 멀리까지 사람을 데려가는지, 그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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