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0일 목요일 오후, 제주 건설회관 3층 회의실에서 「2026년 유니버설디자인 도민참여단」 성과공유회가 열렸습니다. 6월에 시작해 꼬박 3개월, 이날이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어요. 행사 자체는 90분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석 달 치의 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행사 순서 대신 그 걸음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참여단이 무엇을 걷고,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제안했는지 — 그리고 그 제안에 어떤 대답이 돌아왔는지.
시작은 두 발로 걷는 현장조사
대상지는 수월봉 지질트레일과 삼다수숲길. 둘 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의 대표명소입니다. 수월봉은 2010년 인증 당시부터, 삼다수숲길은 2018년에 열세 번째로 이름을 올렸어요. 자연이 제주에 내어준 길이지만, 누구나 그 길 위에 설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참여단은 여름 내내 이 두 곳을 직접 걸으며 이용자를 만나고 불편을 기록했어요.
현장에서 발견한 문제의 핵심은 시설이 아니라 정보였습니다. 삼다수숲길은 내비게이션이 인근 소공원까지만 안내하고, 거기서 입구까지 20분을 더 걸어야 합니다. 막상 도착하면 차단봉이 입구를 막고 있어 들어가도 되는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웠어요. 수월봉은 더 역설적이었습니다. 휠체어 픽토그램이 그려진 표지를 따라가면 계단이 나왔거든요. 갈 수 있다고 말해놓고, 갈 수 없게 만들어둔 것. 문제는 표지가 없는 게 아니라 표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그때 잃는 건 편의가 아니라 공공 정보에 대한 신뢰였습니다.
도트보팅으로 줄 세운 불편, 두 문장으로 남은 가치
현장에서 모은 불편은 워크숍에서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으로 묶고, 도트보팅으로 우선순위를 매겼습니다. 삼다수숲길에서는 ‘차단봉 때문에 진입을 판단할 수 없다’가 1위였고, 고충의 약 80%가 ‘정보를 못 찾음’에 몰려 있었어요. 수월봉에서는 ‘시각 전달 요소 부족’이 별 여덟 개로 프로젝트 전체 최다 득표를 기록했습니다. 두 현장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겁니다.
문제를 줄 세운 다음에는 문제 뒤에 있는, 지켜야 할 가치를 정리했습니다. 삼다수숲길은 들어가도 된다는 확신, 숲의 결을 지키는 절제, 머무를 수 있는 자유. 수월봉은 약속을 지키는 정보, 기본값으로서의 접근, 경관을 해치지 않는 안전. 이 여섯 개의 가치를 두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게 됩니다. “숲 밖에서 해결하고, 숲 안은 비워 둔다.” “새로 짓지 않고, 있는 것을 정직하게 만든다.”
두 편의 시나리오로 완성된 제안

성과공유회에서 참여단에게 주어진 발표 시간은 45분. 90분 행사의 절반입니다. 그 시간에 펼쳐진 결과물이 바로 이 제안들이었어요. 삼다수숲길에는 진입부 통합 안내소 — 코스와 화장실, 소요시간을 도착 전에 알 수 있게 하자는 것. 그리고 벌목재를 그대로 활용한 통나무 의자와 비가림 쉼터 — 새 자재를 들이지 않고 숲에 있던 것으로 만들자는 것. 수월봉에는 다국어·픽토그램 안내체계와 보행자·차량을 분리하는 안전바 — 낮은 채도, 낮은 높이, 언제든 되돌릴 수 있는 가역 설치로.

두 제안 모두 서비스 시나리오 영상으로 제작해, 지금의 모습에서 개선된 모습으로 바뀌는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했습니다. 공통점이 보이시죠. 전부 자연에는 손대지 않습니다. 고치는 건 정보와 진입의 문턱뿐이에요. 3개월 전 회의실 가설이 현장 검증과 워크숍을 거쳐 이 지점까지 온 겁니다.
발표 뒤에 돌아온 두 개의 대답

발표가 끝나고 초빙 인사들의 의견이 이어졌습니다. 제주한라대학교 산업디자인과 학과장 성웅 교수는 디자인의 의미를 다시 짚었어요. 디자인은 보기 좋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라는 것. 현장에서 사용자를 만나고 그 불편에서 출발해 제안을 만든 이번 과정 자체가 그 정의에 부합한다는 평가였습니다. 당일 초빙으로 자리를 함께한 김보영 교수도 참여단의 3개월 여정과 발표에 격려를 보탰어요.
가장 무게 있는 대답은 세계유산본부 이애진 주무관에게서 나왔습니다. 수월봉 현장을 실제로 담당하는 부서죠. 참여단의 성과와 결과가 기대 이상이었다며, 제안 내용을 다음 유네스코 재인증이 이뤄지는 2030년까지 실현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재인증은 현장 관리 수준을 다시 심사받는 자리입니다. 그 심사를 준비하는 담당 부서가, 도민참여단의 제안을 실행 목록에 올리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겁니다. 시민참여 프로그램의 발표가 덕담이 아니라 실행 약속으로 돌아오는 장면, 흔치 않습니다.
도민의 걸음, 도민의 제안, 행정의 약속
이번 참여단은 제주한라대 산업디자인과 학생 네 명을 포함한 도민 열여섯 명, 그리고 임수연 강사와 총괄 정영국 교수까지 모두 열여덟 명이 함께한 여정이었습니다. 20대 학생부터 중장년 도민까지, 휠체어를 이용하는 단원까지. 구성 자체가 이미 유니버설했어요. ‘휠체어 그림이 있는데 가보면 계단’이라는 문제를 자료가 아니라 몸으로 아는 사람이 팀 안에 있었다는 것 — 이번 제안의 설득력은 상당 부분 거기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기념사진을 찍으며 공식 일정은 끝났습니다. 3개월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게 됩니다. 도민이 걷고, 도민이 제안하고, 행정이 약속했다.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의 성패는 결과물의 완성도가 아니라 실행 주체의 약속을 받아냈는지로 갈립니다. 이번 참여단은 그 약속을 받아냈어요. 그것도 2030년이라는 기한과 함께요.
물론 약속이 실현되는 건 이제부터의 일입니다. 안내소가 실제로 서고, 표지가 실제로 정직해지는 걸 확인해야 이 여정의 진짜 마침표가 찍히겠죠. 그래서 이 글은 종료 보고가 아니라 중간 기록입니다. 2030년, 수월봉 재인증 소식이 들려올 때 이 글을 다시 꺼내 보려고 합니다. 그때 참여단의 제안이 현장에 얼마나 남아 있는지 — 그게 이 3개월의 최종 성적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