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디자인

옷을 보여주지 말고 엄마를 보여주세요, 도담루프 — U300+ 예비 컨설팅 6시간 기록

u300회의

8월의 어느 수요일, 청주였습니다. 학생 창업유망팀 U300+ 예비 컨설팅 자리에 멘토로 앉았어요. 아침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한 팀과 꼬박 하루를 보내는 일정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팀은 아이 옷을 빌려 입히는 구독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자료를 받아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아이템 정의, 시장 분석, 구독 요금제, 심지어 시범 플랫폼까지 있었거든요. 개발자가 없는 팀인데 AI를 붙들고 직접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두 달 만에요. 골격은 이미 다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표 자료를 넘기다가 한 지점에서 손이 멈췄어요.

학생 창업유망팀 U300+ 예비 컨설팅 현장

문제 다음에 바로 과정없이 해결책이 나왔습니다

순서가 이랬습니다. 시장 이야기가 나오고, 가격 이야기가 나오고, 엄마들의 고충이 나오고, 불안감이 나오다가 — 갑자기 우리 서비스 소개로 넘어갔어요. 중간이 비어 있었습니다. 문제와 해결 사이에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정의했다”가 없었던 거죠.

듣는 사람은 정보의 양으로 설득되지 않습니다. 연결로 설득됩니다. 한 장 한 장은 다 잘 만들었는데 장과 장 사이가 끊기면, 심사위원 머릿속에는 “좋은 자료였다”만 남고 “그래서 이걸 왜 이 팀이 해야 하는지”는 남지 않아요.

피칭 구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시장의 흐름을 먼저 깔고, 그 흐름에서 문제를 발견했고, 그래서 이런 서비스를 준비했다로 이어지는 기승전결형. 다른 하나는 하이라이트부터 던지는 방식이에요. 저는 후자를 권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심사위원은 그 시장을 이미 알고 있거든요. 다 아는 이야기로 3분을 쓰면 정작 우리 이야기를 할 때쯤 집중이 흩어집니다.

그래서 첫 장면을 훅으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방법은 세 가지를 제안했어요.

  • 질문으로 열기 — “여기 아이 키우시는 분 계세요? 아이 옷 어떻게 입히고 계세요?”
  • 숫자로 열기 — 숫자 하나만 크게 띄우고,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뒤에 붙이기
  • 영상으로 열기 — 1분을 넘기지 않는 짧은 클립. 엄마의 고충이 그대로 보이는 장면이면 가장 셉니다

옷을 보여주지 말고, 엄마를 보여주세요

자료에 적힌 문제는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큰다”였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에요. 그런데 이건 옷의 언어지 사람의 언어가 아닙니다.

저도 아이를 키웠습니다. 그때 저는 옷을 늘 크게 샀어요. 금방 클 테니까요. 한두 살 아이한테 큰 옷을 입히면 소매가 손을 덮습니다. 그래서 접어 올려 입혔죠. 그러다 딱 맞는 옷을 예쁘게 입은 아이를 보면, 솔직히 부러웠습니다. 내 아이도 그때그때 꼭 맞는 옷을 입히고 싶은데 현실은 그게 안 되더라고요. 이 장면이 페인포인트입니다. “아이가 금방 큰다”가 아니라요.

대체 행동과 진입 장벽은 분리해서 쓰세요

여기서 반드시 갈라야 할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지금 엄마들은 이 문제를 이미 나름의 방식으로 풀고 있어요. 중고 거래와 나눔입니다. 그건 이미 작동하는 대체재예요. 반면 렌탈에만 추가로 붙는 장벽이 따로 있습니다. 위생에 대한 신뢰죠. 남이 입던 옷을 돈 내고 빌린다는 건 얻어 입는 것과 심리적으로 전혀 다른 행동이거든요.

이 둘을 한 덩어리로 쓰면 “그거 중고 거래로 하면 되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답을 못 합니다. 반대로 갈라놓으면 서비스의 존재 이유가 선명해져요. 우리는 대체재를 이기는 게 아니라, 대체재가 못 넘는 장벽을 넘는 팀이 되는 겁니다.

팀은 이미 주변에 물어본 상태였습니다. 언니에게, 어린이집 원장인 어머니에게, 아이를 키우는 친척에게요. 반응은 대체로 괜찮았다고 했습니다. 출발로는 나쁘지 않아요. 다만 그건 아직 지인 표본입니다. 나를 아는 사람은 웬만하면 좋다고 말해주거든요. 그래서 숙제를 드렸습니다. 모르는 양육자를 만나서, 그들이 쓰는 문장 그대로 받아 적어 오기. 해외 선행 사업자와 국내에 비슷한 서비스가 자리 잡지 못한 이유도 함께 조사하기.

양육자 페인포인트 논의

신뢰는 말이 아니라 프로세스에서 나옵니다

위생이 장벽이라면, 해법은 “깨끗하게 세탁합니다”라고 쓰는 게 아닙니다. 과정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전 과정을 한 장으로 그리자고 했어요. 수거 → 검품 → 세탁·살균 → 검수·포장 → 배송 → 회수. 그리고 단계마다 품질 기준을 숫자와 문장으로 박아두는 거죠. 서비스디자인에서 말하는 블루프린트가 여기서는 그대로 마케팅 자산이 됩니다.

아동복 전용 세제와 원단 관리 기준은 상세페이지에 문서로 명문화하고, 전문 세탁업체 제휴는 나중 단계의 로드맵으로 붙이기로 했습니다. 지금 당장 제휴가 없다는 게 약점이 아니에요. 어디까지 직접 하고 어디부터 맡길 것인지가 그려져 있으면 그게 계획입니다.

초기 운영 범위는 오히려 좁히라고 했습니다. 청주 안에서만, 팀이 직접 수거하고 직접 포장해서 돌리는 방식으로요. 그리고 그 과정을 릴스와 쇼츠로 남기라고 했습니다. 이 영상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합니다. 고객에게는 위생의 증거, 투자자에게는 실행의 증빙이에요. 초기 팀이 가진 가장 값싸고 강력한 무기입니다.

범위를 좁히는 게 후퇴처럼 느껴진다면 당근을 떠올려보세요. 2015년 판교에서 시작했습니다. 카카오 사내에서 활발했던 중고 거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판교장터’라는 이름으로 열었고, 동네 사람들끼리 믿고 사고파는 구조가 먼저 작동한 다음에 전국으로 퍼졌어요. 신뢰는 넓은 데서 생기지 않습니다. 좁은 데서 먼저 생깁니다.

브랜드는 나중에, 지표는 사람으로

팀은 고민 중이었습니다. 패션 전공이라 옷을 직접 만들 수 있으니 자체 제작으로 갈 것인가, 이미 엄마들에게 알려진 브랜드와 손잡을 것인가. 저는 확장형을 권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존 브랜드로 시작해서 플랫폼을 안착시키고, 그다음에 자체 브랜드를 이 플랫폼 안에서 테스트하는 순서요. 인지도 없는 새 옷으로 처음부터 밀어붙이는 건 두 개의 어려운 일을 동시에 하는 겁니다. 반대로 플랫폼이 자리 잡으면, 그 플랫폼 자체가 자체 브랜드의 테스트베드가 돼요.

목표 지표도 바꾸자고 했습니다. 자료에는 월 매출 목표가 있었어요. 저는 누적 가입자를 앞에 두라고 했습니다. 매출은 요금제를 조금만 손대도 흔들리지만, 사람 수는 이 서비스가 실제로 작동했는지를 보여주니까요. 그리고 향후 계획 마지막에 한 페이지를 붙이기로 했습니다. 자체 브랜드 런칭 계획. 그 한 장이 있으면 심사위원 머릿속에 “이 팀은 여기서 끝나지 않겠구나”가 남습니다.

비어 있던 건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여섯 시간을 마치고 자문확인서에 총평을 한 줄로 적었습니다. 골격은 충실히 준비되어 있으니, 이제 고객의 페인포인트서비스 프로세스라는 두 칸의 디테일을 채우라고요. 이 팀에게 부족했던 건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디어는 이미 있었어요. 비어 있던 건 사람의 언어와 과정의 디테일, 딱 두 칸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 팀은 개발자 없이 AI로 시범 플랫폼을 만들어 왔어요. 몇 년 전이라면 이 단계에 오지도 못했을 팀입니다. 도구가 이만큼 내려왔다는 뜻이죠. 그래서 이제 남는 건 더 분명해졌습니다. 도구로 만들 수 있는 건 화면이고, 만들 수 없는 건 사람의 문장과 손으로 돌린 프로세스입니다. 심사장에서 갈리는 것도 결국 그 두 개예요.

막힌 자료를 손볼 때 저는 늘 같은 자리로 돌아갑니다. 장표를 더 예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장과 장 사이에 빠진 문장을 찾는 자리요. 설득은 자료의 양이 아니라 연결에서 나옵니다. 이건 학생팀에게만 하는 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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